황제의 길 2017. 9. 12. 22:26

황제의 길 5

궁에서 지낸 지도 어느새 1년이 가까이 되고, 종현이 성인이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종현의 집안의 성인식은 매우 특이했다. 점쟁이의 집안답게 성인이 되는 날에는 신어를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천신이 빙의한 것처럼 종이에 신탁을 적어 나가게 된다. 물론, 신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이제 제법 가까워진 진상궁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그 옆에 보이는 건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태황전의 어린 궁녀. 황제를 모시는 궁녀들은 복색도 남달라, 다른 이들과 구분하기 쉬웠다. 그들의 옷의 소매 끝에는 항상 금색 실로 자수가 세겨져 있었다.

"아... 바로 가겠습니다."

종현이 읽던 책을 덮고 태황전의 궁녀를 따라 나섰다. 흐린 날씨 탓인지, 태황전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
.
.

"그래, 요즘엔 잘 지내는가?"
"폐하의 은덕 안에서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종현이 황제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변을 내놓자 황제가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전에 시영이 일은... 들었는가?"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종현이 움찔했다.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일이 결정된 이후, 민현이 손수 제 처소로 와서 말해주었다. 그는 한 장군을 따라 변방을 수비하게 되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종현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를 보면, 아니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래도 그가 떠나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이곳에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이제야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종현이 떨리는 손을 서로 붙잡았다. 황제의 앞이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예, 들었..나이다."
".......참 짐이 면목이 없네. 전에 진작 사과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사과해서 미안하오. 내가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소이다..."

종현의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식.. 교육이라니. 교육을 받지 못한것은 아닌지, 대체 무얼하며 컸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종현의 귀에 들린 것은 자신의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황송하나이다."

황제가 종현을 안타깝게 쳐다보다가 이내 차와 다과를 내오게 하였다. 달콤한 다과가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짐이 부른 것은... 그대의 성인식 때문이오."
"성인식... 말씀이십니까."

종현의 머릿속에서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내 성인식? 왜?

"그래, 그대 가문에서는 대대로 성인식 날 신탁을 받는다고 하더군."
"아...예. 맞사옵니다만..."
"그대의 성인식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싶어 이리 불렀네."
"소인의 성인식을... 말씀이십니까?"
"맞네. 신탁의 내용이 미래와 관련된 것이라지? 꼭 한번 보고싶네만."
"아..."

3황자의 얘기를 꺼내더니, 이내 종현의 성인식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황제. 내 성인식이 왜 보고 싶을까... 종현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신탁 받는게 신기해서 그런가?

"예,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정확히 날짜가 언제인가?"
"다음 달의 아흐레 날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그날 다 준비해놓겠네."
"황송하옵니다."


종현이 별 생각 없이 수락했고, 이에 황제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
.
어느 새 종현의 성인식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종현은 말 그대로 죽을맛이었다.
황제가 종현에게 성인식 참관을 하고 싶다 물어 성급히 수락한 것이 문제였다. 차기 황제가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성인식을 궁에서 한다고 아버지께 연통을 보냈더니, 아버지께서 우려의 말을 담은 편지를 보내오셨다. 혹시나 나라의 부정적인 일이 신탁으로 내려오지는 않을까 이 아비는 염려된단다. 종현은 편지를 읽은 직후에 민현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차기 황제의 신탁이 내려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황궁에 커다란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불 보듯 뻔했고, 최악의 경우 종현의 식솔들은 반란죄로 전부 몰살될 수도 있었다. 신탁을 받기만 한 게 무슨 죄냐고? 신탁을 받은 죄, 나라를 어지럽힌 죄. 그리고...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제 성인식 준비가 한창인데 이제 와 황제에게 무르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종현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기 황제의 신탁이 내려오지 않기를 비는 것 뿐이었다.

"게 누구 있느냐?"

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종현님, 8황자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이제는 꽤 친해진 민현이 들어섰다. 종현이 민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리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민현이 달려와 부축했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가 두고..... 식은땀이 나지 않느냐."

민현이 종현을 장난스레 타박하다가 얼굴에 흥건한 식은땀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민현의 큰 손이 종현의 이마 위로 올라왔다.

"어디 아픈 게냐? 의원을 불러야겠느냐?"

종현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민현이 종현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본인은 그 옆에 앉았다. 종현이 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후우, 한숨을 한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머리가.. 많이 복잡해서 그럽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했길래... 방이 더운 게냐? 여름이 오고 있어서? 침방에 더 시원한 옷을 지으라 말을 해 놓을까?"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러면.. 시원한 차라도 한잔 들자꾸나."

차가운 오미자차와 다과가 나왔다.
시원한 것이 들어가니 한결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종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민현이 이를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며칠 뒤가 성인식이라 들었다."

예, 성인식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종현이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현이 찻잔을 매만지다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것 없는지, 안부도 물을 겸 겸사겸사 온 것인데.. 아무래도 내가 시간을 잘못 맞췄나 보구나."
"..."
"그만 가 보겠으니, 좀 누워서 쉬어라. 성인식 날에도 아프면 안될것이 아니냐."

민현이 말을 마치고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현이 조용히 민현을 불렀다.

"황자님."
"응?"

민현이 뒤돌아보았다. 종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쉬고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고 싶으십니까."

이를 들은 민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민현이 조용히 종현에게로 다가와 왼손을 탁자에 짚고 오른손으로 종현의 턱을 그러쥐며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종현은 이때 처음 느꼈다.
이 남자, 위험해.
두 눈은 붉은빛으로 물들은 듯 했고, 입꼬리는 가볍게 비웃듯 미묘하게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발톱을 숨긴 맹수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황자이시니까요. 황위 계승권이 있으시니까요. 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어버이가 되실 수 있는지, 감히 궁금합니다."
"한 사람만 나를 믿어 준다면."
"..."
"이번에는 내가 묻지.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무슨..."
"대답하거라."

민현이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종현은 그 기세에 눌려, 입을 열수조차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끄집어냈다.

"저는..."
"그래."
"황자님을...."
"나를?"
"...."

무어라고 답을 해야할까. 당신이 황위에 오를 몸이라고?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내가 아픈 애를 상대로 뭐하는 짓인지, 참..."

평소의 민현으로 돌아왔다.
턱에서 손이 떨어지자, 종현이 저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났다. 평소에는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싫어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무서웠느냐? 눈물이.."

당황한 민현이 종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종현에게 채 닿기도 전에 종현이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살짝 제 눈에 손을 대보니 물이 묻어나왔다. 민현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는 물러났다.

"...쉬거라."

한마디를 남기고 민현이 방을 나섰다.
민현이 나가자마자 종현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빠오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종현이 느꼈던 그 느낌은 이미 황자의 것이 아니었다. 종현이 보았던 미래가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곧 황궁을 집어삼킬 피바다를 떠올린 종현이 힘없이 쓰게 웃어보였다.
한편, 민현은 종현의 처소를 나서며 본인이 말실수를 했으니 잘 달래달라고 진상궁에게 작게 언질을 주었다. 이후 바로 그의 정원으로 갔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문을 잠그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그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문득 종현에게 준 군자란이 생각났다. 여전히 붉고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군자란을 보며 종현을 떠올리던 그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숨섞인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너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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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2017. 8. 14. 00:14

황제의 길 4

"종현님! 어디계셨습니까! 괜찮으신겝니까!"

처소로 돌아오니 이미 연각에서의 일이 전해진 듯 놀람으로 상기된 얼굴으로 종현을 맞아주는 진상궁이다. 종현의 눈기젖은 눈을 보자마자 도리어 진상궁이 울 것 같았다. 그녀가 종현의 몸을 이리 저리 살피며 옷이 찢어진 곳은 없는지, 다친곳은 없는지 살폈다. 그녀가 낮은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 말하려 종현의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이 잡히는 순간 종현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가 아차 하고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 순간 진상궁의 눈매가 매서워지더니 종현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새파랗게 멍이 든 손목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이제야 종현이 들고 있는 붉은 꽃으로 눈을 돌렸다. 손목과 꽃을 번갈아 보던 진상궁이 곧 이해한듯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8황자 전하시군요."
"어떻게..."
"궐 안에서 이리도 어여쁜 꽃을 가꾸는 곳은 8황자 전하의 정원밖에 없으니까요."

이제야 진상궁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군자란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고귀>라는 꽃말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봄에 피는 꽃인데, 8황자께서 공들여 날씨에 관계없이 피는 꽃들 중 하나입니다."
"고귀... 라구요."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그래도 나를 고귀하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종현이 꽃을 전해줄 때의 민현을 떠올렸다. 분명 올해 우연히 피었다고 하셨는데.. 생각을 더듬어 보니 말을 할 때 8황자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부끄러우셨나 보네.

"계십니까?"

때마침 8황자전의 궁녀가 도달했다.

"무슨 일이냐?"
"8황자님께서 이 연고를 종현님께 보내라 이르셨습니다."

궁녀가 말을 마치고는 곱게 싸인 연고를 종현에게 건넸다.

"....감사하다 전해드릴 수 있겠느냐."
"예. 그럼 물러가겠나이다."

진짜 보내주셨네, 연고.

"들어가 바르고 계십시오. 따뜻한 차와 다과를 금방 올리겠습니다."

진상궁이 종현을 방에 두고 차와 다과를 가지러 나갔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폐하께 내가 왔다고 고하거라."
"황자 전하, 지금 폐하께선 대신들과 논의를..."

민현이 상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8황자, 이게 무슨 추태냐."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기된 얼굴에, 날카로워진 눈빛을 보고 황제가 할 말을 잃었다. 철이 들고, 한번도 감정적으로 행동한 적 없었던 민현이었기에 심상치 않은 일이라 짐작되었다.

"미안하오. 내일 다시 논의 할 수 있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용히 예를 표하고 나가는 이는 이 나라의 재상 중 한명인 영의정 이정이었다. 민현이 그가 나가는 것을 짧게 바라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오늘이 3황자 형님의 생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연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형님께서 오늘 모든 황자들과 형님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내를 겁탈하려 하셨습니다."
"무어라!"

황제가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그가 차를 내오게 하였다. 잠시 후 차가 나오고, 민현이 차분하게 이를 받아들었다.

"그래서, 사내는 누구더냐."
"...점쟁이의 아들입니다."
"뭐라?!"

황제가 잔을 탁, 놓쳐버렸다.
와장창 -
잔이 산산조각 나 깨져버렸다.
그 와중에도 민현은 차분함을 유지 한 채 차를 마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소자가 형님이 겁탈하려 하였다 라고 고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는 무사하옵니다."
"하아, 아소 그놈이 기어코... 정말 막 나가는구나. 분명 네가 제지했을 테니 네가 이리 달려왔겠지. 그 아이는 어떠하냐? 괜찮은 게야?"
"많이 놀란 듯 싶었으나, 달래어 처소로 보냈습니다."
"허어, 참.... 이럴때 보면 황제의 재목은 너이거늘."

찻잔을 내려놓던 민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지금, 무슨.."

황제도 당황한 듯 싶었다.

"들었느냐?"
"... 아니오, 못 들었습니다."
"내 잠시 허언을 했구나. 못 들었다니 다행이로다."

입으로는 허언을 했다 하지만, 민현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날카로웠다.  민현이 아주 어렸을때, 폐하가 아닌 아버지로 부르던 시절 들은 말이 순간 생각났다.

"민현아, 궐에서는 때로는 제대로 들은 것도 못 들은 체 하고, 제대로 본 것도 못 본 체 해야 할 때가 있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네가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아비의 말을 잊지 말거라."

민현이 찻잔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제가 형님의 손목을 꺾었습니다. 아마 금이 가거나 골절되었을 테지요. 미리 고할 겸 해서 왔습니다."
"...알겠다. 네가 다친곳은 없을 터이니 딱히 묻지 않겠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네게 문책하지 않을테니, 맘쓰지 말거라."
"황송하나이다."

순간, 손에 붕대를 감고 3황자가 들이닥쳤다.

"아버님! 민현 이 자식이 감히 제 손목을.. 어라? 너 이 새끼는 왜 여기 와 있는거냐?"

아직도 술기운이 다분했다. 감히 술을 마시고 폐하 앞에 서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3황자 아소가 비틀비틀 민현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민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소 네 이놈!"

황제의 노여움도 상관 없는 듯 보였다. 3황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너 이 새끼, 니새끼 때문에 부러진 내 손목을 봐! 시발새끼야! 그깟 점쟁이의 아들놈이 뭐라고 내 손목이 이렇게 분질러져야 하는거냐! 그 새끼가 얄상하니 계집마냥 곱게 생긴 것이 잘못이지, 홀린 내가 잘못이냐고! 새끼야, 내 밑에서 한번쯤 우는게 어때서!"

말을 마치려던 3황자가 무언가 알아차린듯 깔깔 웃으며 민현을 바라본다.

"크하하, 설마 독점욕인거냐? 네놈에게는 이미 밑을 대 주었느냐? 그래서 그런거로구나? 하하하! 이제 이해가 되는구나!"
"....반대쪽 손이라도 부지하시려면 그만하시지요."
"호오, 이젠 나를 겁박하는 게냐? 응? 네놈과 그 새끼가 한밤중에 정원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이래도 발뺌할 게냐?!"

3황자가 민현의 어깨를 잡고 미친듯이 웃으며 앞뒤로 흔들어댔다.

우두둑 -

"아악! 내 손가락!"

민현이 다시 손을 들어 손가락에 힘을 주어 3황자 아소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귀에 속삭였다.

"그 입 닥쳐. 그 날은 그 아이가 궁에 처음 온 날이야.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하다가 내가 실수로 열어둔 정원에 들어간거고. 알려면 제대로 알라고, 미친새끼야."

말을 마친 민현의 눈이 소름돋게 차가웠다. 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3황자가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3황자!"
"아,아버님."

이제야 3황자의 눈에 황제가 들어왔다. 분노에 차, 얼음과도 같은 민현과 달리, 머리 끝까지 화가 나 마치 불과도 같은 황제를.

"당장 나가거라!"
"송,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저놈이..."
"내 말이 말 같지 않으냐?! 당장 궐 밖으로 나가란 말이다!"
"궐 밖이라니요..?"
"넌 오늘부로 내 아들이 아니다! 네가 어울리는 그 쓰레기같은 양아치 무리들에게 가던, 네 돈으로 집을 사건 내 알바 아니다! 어서 나가거라!"
"폐하, 진정하십시오. 처사가 지나치십니다.."
"어찌 민현이 네가 짐에게 진정하라 하는게냐! 너는 저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게야?!"
"아버님, 세간의 눈을 생각하십시오. 황자를 폐위시키다니, 호족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자칫 황권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차분히 이후의 일을 예상해 말해오는 민현에 황제가 간신히 진정했다.

"아소 네놈은 처소로 돌아가 꼼짝하지 말거라. 네놈의 그 친구들도 당분간 만나지 말아라!"
"하지만..!"

항의하려던 3황자가 민현의 눈을 보고는 말을 아꼈다.

"알아들었으면 나가거라! 술먹고 황상 앞에 선 죄, 감히 황상 앞에서 언행을 거칠게 한 죄, 그리고 감히 황상 앞에서 멱살을 잡은 죗값은 후에 통보하겠다. 나가거라!"
"...예."

더 있다간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3황자가 재빨리 나갔다.

"후우, 그 아이에게는 황실 의원을 보내주거라. 그리고 네가 자주 가 주려무나. 짐이 대신 미안하다고도 전해주고."
"...예, 폐하."

조용히 예를 표하고 나간 민현을 바라보던 황제가 묘한 눈으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지금 보면 황제감은 틀림없는 민현이다. 자신의 사후, 분명히 벌어질 황위다툼에 벌써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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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2017. 8. 6. 00:20

황제의 길 3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종현은 기약 없이 계속 궁에 있었다. 제가 황자들의 운명을 다 제대로 읊어 주어야 궁을 나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아니, 그래도 나가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마음이 복잡해 본가에서 가져왔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져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쾅 -

"황자 전하! 3황자 전하! 아무리 급하셔도 어찌 이리...!"
목소리에 노기가 찬 진상궁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문을 부서져라 힘차게 열고 종현의 방 안으로 들어온 3황자 시영이다.

"종현아! 사흘 뒤가 내 생일이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도 좋아 생일까지 외운 게냐? 놀랍구나."

아니요, 궁궐에서 살아남으려 그쪽 형제들 이름 특징 생일 등등 달달 외웠습니다만..

"내 생일 연회가 연각에서 열릴 게다. 올 것이지?"
"꼭 가야 되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그럼, 내 생일도 알면서 오지 않을 심산이었느냐?"
"갖고 싶으신 선물을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가겠사옵니다."
"흐음, 갖고 싶은 선물이라... 네가 보기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으냐?"

종현이 아차 싶다. 그래, 명색이 제국의 황자인데 못 가진 것이 있을까.

"미처 생각을 깊게 못 했나이다. 송구하옵니다.."
"아니, 송구할 것 까진 없고, 너만 오면 된다. 꼭 오너라. 알겠지, 응?"
".....예."
"그럼 우리 예쁜 종현이 사흘 뒤에 보자꾸나!"

3황자 시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나선다. 종현은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아, 저런 개망나니 같은...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종현에게로 와 안색을 살피는 진상궁이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방금 시영이 박차고 나간 문을 죽일듯 노려보는 진상궁. 종현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진상궁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정말 괜찮습니다.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러니, 산책을 조금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들어오시면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안쓰러움과 따뜻함이 뒤섞인 진상궁의 눈빛에 종현은 공연히 본가의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올 뻔 했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야속하게도 3황자 시영의 생일날이 밝아버렸다.

"아으으.... 결국 아침이네."

괜히 침상에서 늦게 일어나고, 밍기적밍기적 느리게 씻고, 밥도 먹는둥 마는둥 느리게 먹어 갔다.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를 하거나 눈치를 주었을 진상궁이지만, 지금 죽을맛인 종현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조용히 옆에서 밥 먹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며 허비한 시간이 두 식경. 마침내 종현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뎌 연각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숨을 훅 들이마쉬며 연 연각의 문 안에는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종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최대한 구석진 자리로 찾아 앉으려는 그 때.

"여어~ 우리 종현이다!"

술에 취한 3황자가 종현을 알아보았다.

"종현이 어디가니~ 여기 바로 내 옆에 자리가 비었는데!"

자신의 자리 옆 빈 자리를 탕탕 치며 호탕하게 웃는다.

"내가 일부러 여길 비워뒀는데! 응?!"
"황자 전하, 전 여기가 편하옵니다. 부디.."
"뭐라고! 내 호의를 거절하는 게냐?!"
"아, 아닙니다. 송구하옵니다."

술에 취한 3황자를 건드려 괜히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된 종현이 더 이상의 거부는 하지 않고 조용히 3황자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3황자 시영의 무릎에서는 벌써 여인이 둘이나 앉아 술을 따르고 있었다. 종현이 와서 앉자 3황자가 두 여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의자를 종현에게로 바싹 끌어당겨 안는다.

"종현아, 내가 조금 뒤 무엇을 하고 있을지 보이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보기 싫었던 것 뿐이었다. 보아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시영이 오싹하게 웃고는 이내 종현을 상 위에 눕히고 손목을 잡아 고정시킨 뒤, 종현의 입술을 자신의 손으로 한번 쓱 훑은 뒤 다시 묻는다.

"이래도?"
"이, 무슨.. 무슨 짓입니까!"
"처음 본 날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다 종현아. 곱디고운 얼굴에, 가녀린 몸에. 네가 오늘 나의 선물이다.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면 준비해 온다 하였지? 네 몸이 갖고 싶구나."
"싫, 싫어..."
"싫다 한들 어찌하겠느냐. 너는 이미 붙잡혀 있는데."

3황자 시영이 웃으며 종현의 옷고름을 풀려는 그때였다.

쾅 - 쨍그랑 -

조용히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구석에 앉아 있던 8황자 민현이 술상을 별안간 뒤엎어 버렸다. 잔이 깨지고 술이 쏟아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음보다 차가운 얼굴로 상석으로 걸어가 3황자 시영의 오른손목을 한손으로 비틀어 꺾어 버리고는 그의 품에서 울고 있던 종현을 거칠게 빼냈다.

"으아악! 황민현! 무슨 짓이냐!"
"8황자!"

3황자의 고통에 찬 비명과 황태자의 놀람에 가득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현은 종현의 손목을 붙잡고 연각 밖으로 나가버렸다. 종현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가기를 약 십 분. 마침내 민현이 한 곳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종현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손목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괜찮으냐."

다정한듯 무심하게 물어 오는 민현에 종현이 더 서러워져 참으려던 울음이 터져버리고 만다.

"흐윽... 끅.... 흑...."

민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당황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종현을 품에 안아서 토닥토닥 달래준다.

"괜찮다. 여긴 우리밖에 없어. 울고 싶은 만큼 울어라. 여기서 나가면 이렇게 울지 못할 게야.."

민현의 따뜻한 품에 안겨 울기를 한참이었다. 민현이 도리어 미안해질 정도로 종현은 정말 펑펑 울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내가 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8황자님이 나서지 않으셨으면 현실이 되었을 끔찍한 미래가 떠올라 그저 속상하고 서러울 뿐이었다. 한참을 더 울고 나서 종현의 눈물이 간신히 멎었다. 민현에게서 떨어지니 이제야 보이는 제 눈물로 흠뻑 젖은 민현의 옷. 하필 오늘 연하늘색 옷을 입어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종현이 당황해서 손을 뻗어 물기를 털려고 하였다.

"아, 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미 눈물이 비단에 다 스며든 건지 아무리 털어도 하나의 변화도 없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이냐?"
"....예.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위를 둘러 보니 8황자를 만났던 정원이다. 제게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저를 데려왔는지... 의문에 찬 눈으로 민현을 올려다 보자 민현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럼, 길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줄 수는 없지 않느냐."
"아... 예. 송구하온데 저는 8황자 전하와 나이가 같사옵니다."
"응, 알고 있다."
"아..... 예에.."

종현이 울어서 새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한다.

"꽃을... 조금 보아도 괜찮을련지요?"
"마음껏 보거라."
"감사합니다."

 민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종현이 꽃을 보다가 향기를 맡으러 고개를 숙이고 팔을 걷으니 이내 새파랗게 멍이 든 손목이 드러난다. 민현의 눈이 다시 한번 차갑게 식더니 종현에게 걸어가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이 왜 이러는 것이냐."

민현이 다른 손목도 걷자 그쪽도 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아니, 그쪽은 더 심했다.

"어찌하여..!"
"..... 아까 3황자..전하께서 잡으셨을 때 멍이 들었는데, 이곳으로 오다가 왼손목의 멍이 짙어졌습니다."
"내가 붙잡아서 멍이 짙어졌다는 이야기구나. 미안하다. 내게 멍에 잘 드는 약이 있으니, 내 처소의 궁녀에게 일러 약을 가져다 주라 하겠다. 미안하구나."
"황자 전하께서.... 어찌 미안해하십니까. 황자 전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종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눈가가 붉어진 것이 꼭 다시 울 것만 같다.

"...알겠으니 울지 말거라. 탈수로 쓰러질까 염려되니."

민현이 종현을 안고 다시 토닥토닥 달래주었다. 울지 말거라, 속삭이며 말이다.

"이제 이 곳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 자, 여기 이곳을 들어오는 열쇠니라. 이건 복사본이고, 원본은 내 처소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다시 눈가가 붉어져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받아든 종현이다.

"아, 그리고.. "

민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금 떨어진 붉은색 꽃에게로 걸어가 조심스레 몇 송이 꺾어 종현에게 주었다.

"군자란이다. 원래 1월~3월에 피는 꽃인데 10월이 다 된 지금에도 피었구나. 너에게 주라고 핀 것이겠지."

이내 문을 열어 종현에게 나가자 손을 내미는 민현이다. 손을 잡아야 할지 말지 고민하다 종현이 손 대신 말을 건넸다.

"...나인들이 오해합니다."
"아... 알겠다."

민현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어 들이고는 앞장 서 정원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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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2화

본 글은 선우님께서 주신 소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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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나 괜찮을까."

잠이 잘 오지 않아, 종현은 야밤에 처소에서 벗어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처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뒤로 이어진 자그마한 문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 뭐야 어디로 통하는 문이지? 밖으로 나가는 문은 아닌듯 싶은데.."

들어가면 안 될 것도 같았지만, 결국 호기심에 못 이기고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내 종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소박한 꽃들인데, 다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화려하고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받았다. 본래 저 같이 아리따운 꽃들을 좋아했던 종현이 미소를 띄고 찬찬히 꽃들을 보려는 그 순간.

턱 -

자신의 목덜미를 사납게 낚아채는 이가 있어 놀라 뒤 돌아보니 8황자 민현이다. 아까 종현이 차기 황제라 느꼈던 이 이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예가 어디인지는 알고 함부로 발을 들인게냐?"

자신의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민현에 종현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몸이 경직되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소름이 조금 가시고 나니 이제야 조금 불쾌해진 종현. 아니, 아무리 황자라도 남의 몸에 손을 대?

"귀하신 몸이라고, 사람을 이리 막 대하셔도 되는 겁니까?"

종현이 하는 말에 잠시 멍해있던 민현이 키득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배꼽을 잡고 크게 웃는다. 제 위의 7명의 형님들의 어머니는 모두 귀한 집 따님이시다. 황태자와 2황자의 어머니는 타국 공주시고, 나머지 형님들의 어머니들의 집안은 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귀한 혈통을 지닌 집안이다. 병조판서의 딸, 좌의정의 딸, 호조판서의 손녀, 이조판서의 조카딸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그에 비해 민현의 어머니는 궁녀출신이다. 궁녀중에서도 양반집 자제가 있고 아닌 궁녀가 있는데, 제 어머니는 핏줄이 천하다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종현의 "귀하신 몸" 이라는 표현이 웃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커다란 웃음 사이로 깊은 슬픔이 보인 것은 종현의 착각이었을까.

"왜.... 웃으시는 겁니까? 소인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이상해진 종현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아니, 나는 말실수 한거 없는데 왜 웃지...?

"미래를 볼 수 있다더니, 나에게 아부하는 것이냐? 그런 아부는 위에 형님들한테나 가서 하거라. 나 원 참..."

민현이 말을 마치자 종현이 눈을 깜빡거리며 민현을 올려다 본다. 다시 보인다. 분명히 보였다, 민현이 황상으로 즉위하는 모습이. 황제의 관을 머리에 올려주는, 키가 저와 비슷한 자가 있다. 민현이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민현이 차기 황제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미래를 발설해 버리면 모든 것이 뒤틀려 버릴까봐.

"황자님께선... 분명 큰 사람이 되실 겁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지 마세요."

말을 마치고 종현은 정원을 빠져 나간다. 의미심장한 말에 민현이 종현의 말을 곱씹고 있었던 찰나, 종현이 다시 조심스레 다가온다.

"헌데, 제 처소는 어느 방향인지요..?"

헛웃음을 짓던 민현이 그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궁을 돌아다닌 게냐고 타박을 주자 금방 울상으로 변하는 종현이다. 민현이 종현을 처소로 데려다 주며 당부한다.

"궐은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다.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거라. 또한, 오늘 나를 보았던 정원을 다시는 찾지 말거라. 내가 너에게 해 줄수 있는 최대한의 충고이니라."

종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처소에 들어가라 재촉하는 민현.




짹짹짹-
환한 햇살이 방을 비추고, 새가 울며 날아가자 잠에서 깬 종현. 항상 일정한 시간을 자던 자신이었기에, 평소보다 한 식경이나 늦게 일어난 것을 알고 놀라 어젯밤에 무엇을 하다 늦게 잠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한다. 이윽고 생각난 정원과 민현. 대체 왜 다시는 제게 그 정원에 오지 말라는 것인지, 왜 제가 한 말에 그리도 크고 슬프게 웃었는지 의문투성이다. 이윽고 한 상궁이 아침상을 내온다.

"상을 두고 가겠습니다. 다 드시고 난 후, 문 밖에만 가져다 두시면 치우겠나이다."

상을 두고 물러가려는 상궁의 팔을 종현이 붙잡는다.

"궁, 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물어봐도 될까요?"

상궁 당황하지만, 반쯤은 궁에 갇힌 처지인 종현이 무얼 알겠는가 싶어 된다고 한다.

"음.... 저기 제가 어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처소 밖에 나갔다가 궐 뒷편에 정원을 발견했어요. 근ㄷ"

"정원이라뇨! 무슨 정원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저기 뒤편에 정원 있던ㄷ"

상궁이 낮게 비명을 지르곤 이내 종현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손가락을 들어 종현의 눈앞에 갖다 댄다.

"몇개로 보이십니까!"

"3개요. 왜,왜이러세요..."

"8황자님을 만나지 않은 것입니까?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8황자님 만났어요. 그런데 그 정원이 무슨....왜 그러는거죠? 정원에 무슨 일이 있나요? 8황자님이랑 관련이 있는건가요?"

상궁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사람이 없는것이 확인되자, 이내 말을 꺼낸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궐 안에서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즉, 어디서도 꺼내면 안되는 이야기이고, 제게 들었다는 사실조차 잊으셔야 합니다."

상궁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 종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8황자님의 어머니 숙원 서 씨께서는.... 양반집 자제가 아니셨습니다. 평범한 출신의 궁녀로, 어느 날 폐하의 눈에 들어 숙원이 되신 겝니다. 천인이 아니셨으니 미천한 신분은 아니지만, 궐 안의 폐하의 여인들은 타국의 공주 또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들의 따님이시니 비교적 천한 신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저는 딱 한번 뵈었지만,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셨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폐하께서 반하신 게지요. 외모뿐 아니라 마음씨도 무척 고우셨다 들었습니다. 8황자님께서는 숙원께 사람에게 귀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다 귀한 존재라 배우며 자라셨습니다. 덕분에 가끔 궐 밖에 숙원과 함께 나가실 때, 천인 아이들과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들어오는 일이 빈번하셨죠.. 하지만 짖궂은 형님들에게 천한 어미의 아들이라며 늘상 놀림을 받았고, 결국 형님들과의 사이에 벽 아닌 벽이 생기게 됩니다."

아, 그래서 어제 내가 귀하신 몸이라 했을때 슬프게 웃은건가.... 대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은걸까. 괜시리 미안해지는 종현이다.

"돌아가신 숙원 서씨께서는 8황자님을 낳고,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몸이 약해지신 숙원을 위해 폐하께선 숙원께서 좋아하시던 꽃을 한가득 심은 정원을 만들어 주셨지요. 그 정원이, 어제 밤에 다녀오신 정원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종현.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어느날 숙원께선 앓아 누우셨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 추측으론......"

상궁이 망설이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다시 말을 꺼낸다.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숙원이 샘이 나 다른 후궁들 중 한명이 일부러 독을 푼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원의 꽃들 중 숙원께서 가장 좋아하던 꽃에 독이 묻어 있었고, 숙원께서는 서서히 독에 중독되어 가신 겝니다. 2년을 앓던 숙원께서는 돌아가셨고.... 독에 중독되셨다는 것 마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8황자님께서도 숙원께서 돌아가시고 약 3년이 지나고 알게 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시고, 방치되었던 정원을 그때부터 8황자님께서 직접 관리하시게 되었습니다. 꽃을 다 뽑아 버리고, 같은 종류의 꽃들을 심어서 8황자님 외에 타인이 들어가면 정말 큰 변을 당합니다. 8황자님께서 올해 열일곱 성년이시니... 2년전이면 열다섯이시지요. 그때 철딱서니 없는 어린 궁녀가 멋모르고 정원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꽃을 구경하다 8황자님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 후에 3황자님께서도 호기심에 들어가셨다 8황자님께 매타작을 받고 열흘을 사경을 헤매셨습니다. 그때 난리도 아니었죠.."

이야기를 마친 상궁이 다시 한숨을 푹 쉰다.

"하여튼, 거기 다시는 가지 마십시오.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갑자기 소름이 돋아 어젯밤 민현의 손이 닿았던 목을 만지자 차가운 느낌이 드는 듯 하다. 상궁의 눈길이 아침상에 닿고, 이야기 하는 새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들이 보인다.

"음식이 식었으니 다시 내오겠습니다."

상을 들고 나가는 상궁을 보다 종현이 외친다.

"저, 그런데 성함이 무엇인지요!"

상궁이 우뚝 서 웃으며 종현에게 말한다.

"진상궁이라 불러주시면 되옵니다. 앞으로도 제가 뫼시게 될 것이니,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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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2017. 7. 23. 23:16

황제의 길 1화

본 글은 선우님께서 주신 소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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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아주 아름다운 한 나라가 존재하였네.
산천이 아름답고 웃음이 넘쳐나니, 이보다 좋을 수 없으리.
이 나라의 왕에게는 8명의 황자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마지막 황자인 제 8황자는 문무를 모두 갖추었네.
아름답기도 하여라, 황자여.
용모가 수려하고 문무에 모두 빼어나니, 따라올 자가 없으리라.
흠이 있다면, 오직 마지막 황자라는 것이다.
허나 이 황자는, 결국 자신이 스물셋이 되던 해,
장미가 흩뿌려지는 날 이를 사뿐히 밟고 황위에 올랐네.
어디서부터 운명이 시작된걸까.
잠시나마 어지러웠던 제국을 환하게 비추길, 황자 민현이여.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마지막 황자인 민현이 성인이 되는 날, 민현의 아버지 황제는 드디어 모든 황자들이 성인이 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용한 점쟁이의 아들인 종현을 궁으로 부른다. 용한 점쟁이를 직접 부르지 않고 아들인 종현을 부른 이유는, 종현이 미래를 볼 수 있다 알려진 탓이다.

"그래, 황태자에선 무엇이 보이느냐?"

사실대로 말하면 목이 날아가겠지? 아니, 내 목이 날아가는건 그렇다 쳐. 어마무시한 권력다툼이 이 나라를 집어 삼킬거야. 황태자가 비참하고 외롭게 요절할거라는걸 어떻게 말해!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두번 말 하게 하지 말거라."
"송,송구하옵니다. 그것이.."
"그것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에 종현은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기절해버리고 싶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황태자님께서 너무 대단하여서 미,미래가 잘 보이질 않습니다!"

하하핫!
호탕하게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웃어재낀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종현에게 묻는다.

"그래,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그리 어려웠느냐? 앞으로도 솔직히 말하거라. 내 너에게 상을 내렸으면 내렸지, 절대 벌을 내리진 않을 것이야."

"황송하옵니다, 폐하!"

땅에 머리를 박을 듯이 깊숙히 절을 하고는 입술을 깨무는 종현. 아, 어떡하지...

"궁에 머물며 다른 황자들의 미래도 찬찬히 살펴서 내게 알려주거라. 궁 나인에게 일러 너의 처소를 마련하라 명하겠다."

"명을 받잡겠나이다...폐하."

한숨을 푹 내쉬며 대전을 나서는 길.
아버지인 황제를 단체로 알현하러 오던 나머지 황자들 7명을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모두 귀양을 가거나 요절할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죄목은 반역죄. 반역죄는 누구에게도 용서받을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되는 중죄 중의 중죄이다. 황자들이 반역죄라니, 대체 왜?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던 종현에게 맨 앞에 서 있는 황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을 한다.

"넌 누구지? 왜 그리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야? 귀신이라도 본 거냐?"

"아, 그게...."

뒤에 있던 다른 황자도 거들어 온다.

"말로 할때 어서 고하거라. 내 침실로 부르기 전에."

"형님!"

웃는 소리가 오가고,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던 종현의 눈에 맨 끝에 서 있는 수려한 외모에 훤칠한 키의 소유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 저자로구나, 차기 황제가. 피로 가득찬 손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직 황제의 색인 황금빛으로 가득 수놓은 옷을 입은 마지막 황제가 보였다. 저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처단한것이구나. 그래, 이제 말이 된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넌 누구고, 왜 우리를 보고 놀라는거지?"

어느새 맨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이 차갑게 식은것을 눈치챈 종현이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저는 유명한 점쟁이의 아들, 김종현이라고 합니다. 황자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님들의 빼어난 외모에 잠시 말을 잃었사옵니다. 송구합니다."

"잘생긴 거 나도 안다. 그럼 이제 내 밤시중을 들 테냐?"

아까 침실로 부른다는 발언을 했던 황자가 순식간에 종현의 옆으로 와 종현을 품에 안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당황한 종현이 어버버 하는 사이에 2황자로 추정되는, 맨앞에 있으니까, 맨 앞의 사람이 이마에 손을 짚고 찌푸리며 말을 한다.

"3황자 황시영, 도를 지켜라. 여기는 대전 앞이다."

"앗 예엡 - 죄송합니다 아소 형님."

그렇게 황자들이 지나가고, 종현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쉰다. 하아, 나 궁에서 나갈 수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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