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길 2017. 8. 6. 00:20

황제의 길 3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종현은 기약 없이 계속 궁에 있었다. 제가 황자들의 운명을 다 제대로 읊어 주어야 궁을 나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아니, 그래도 나가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마음이 복잡해 본가에서 가져왔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져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쾅 -

"황자 전하! 3황자 전하! 아무리 급하셔도 어찌 이리...!"
목소리에 노기가 찬 진상궁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문을 부서져라 힘차게 열고 종현의 방 안으로 들어온 3황자 시영이다.

"종현아! 사흘 뒤가 내 생일이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도 좋아 생일까지 외운 게냐? 놀랍구나."

아니요, 궁궐에서 살아남으려 그쪽 형제들 이름 특징 생일 등등 달달 외웠습니다만..

"내 생일 연회가 연각에서 열릴 게다. 올 것이지?"
"꼭 가야 되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그럼, 내 생일도 알면서 오지 않을 심산이었느냐?"
"갖고 싶으신 선물을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가겠사옵니다."
"흐음, 갖고 싶은 선물이라... 네가 보기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으냐?"

종현이 아차 싶다. 그래, 명색이 제국의 황자인데 못 가진 것이 있을까.

"미처 생각을 깊게 못 했나이다. 송구하옵니다.."
"아니, 송구할 것 까진 없고, 너만 오면 된다. 꼭 오너라. 알겠지, 응?"
".....예."
"그럼 우리 예쁜 종현이 사흘 뒤에 보자꾸나!"

3황자 시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나선다. 종현은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아, 저런 개망나니 같은...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종현에게로 와 안색을 살피는 진상궁이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방금 시영이 박차고 나간 문을 죽일듯 노려보는 진상궁. 종현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진상궁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정말 괜찮습니다.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러니, 산책을 조금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들어오시면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안쓰러움과 따뜻함이 뒤섞인 진상궁의 눈빛에 종현은 공연히 본가의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올 뻔 했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야속하게도 3황자 시영의 생일날이 밝아버렸다.

"아으으.... 결국 아침이네."

괜히 침상에서 늦게 일어나고, 밍기적밍기적 느리게 씻고, 밥도 먹는둥 마는둥 느리게 먹어 갔다.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를 하거나 눈치를 주었을 진상궁이지만, 지금 죽을맛인 종현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조용히 옆에서 밥 먹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며 허비한 시간이 두 식경. 마침내 종현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뎌 연각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숨을 훅 들이마쉬며 연 연각의 문 안에는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종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최대한 구석진 자리로 찾아 앉으려는 그 때.

"여어~ 우리 종현이다!"

술에 취한 3황자가 종현을 알아보았다.

"종현이 어디가니~ 여기 바로 내 옆에 자리가 비었는데!"

자신의 자리 옆 빈 자리를 탕탕 치며 호탕하게 웃는다.

"내가 일부러 여길 비워뒀는데! 응?!"
"황자 전하, 전 여기가 편하옵니다. 부디.."
"뭐라고! 내 호의를 거절하는 게냐?!"
"아, 아닙니다. 송구하옵니다."

술에 취한 3황자를 건드려 괜히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된 종현이 더 이상의 거부는 하지 않고 조용히 3황자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3황자 시영의 무릎에서는 벌써 여인이 둘이나 앉아 술을 따르고 있었다. 종현이 와서 앉자 3황자가 두 여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의자를 종현에게로 바싹 끌어당겨 안는다.

"종현아, 내가 조금 뒤 무엇을 하고 있을지 보이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보기 싫었던 것 뿐이었다. 보아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시영이 오싹하게 웃고는 이내 종현을 상 위에 눕히고 손목을 잡아 고정시킨 뒤, 종현의 입술을 자신의 손으로 한번 쓱 훑은 뒤 다시 묻는다.

"이래도?"
"이, 무슨.. 무슨 짓입니까!"
"처음 본 날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다 종현아. 곱디고운 얼굴에, 가녀린 몸에. 네가 오늘 나의 선물이다.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면 준비해 온다 하였지? 네 몸이 갖고 싶구나."
"싫, 싫어..."
"싫다 한들 어찌하겠느냐. 너는 이미 붙잡혀 있는데."

3황자 시영이 웃으며 종현의 옷고름을 풀려는 그때였다.

쾅 - 쨍그랑 -

조용히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구석에 앉아 있던 8황자 민현이 술상을 별안간 뒤엎어 버렸다. 잔이 깨지고 술이 쏟아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음보다 차가운 얼굴로 상석으로 걸어가 3황자 시영의 오른손목을 한손으로 비틀어 꺾어 버리고는 그의 품에서 울고 있던 종현을 거칠게 빼냈다.

"으아악! 황민현! 무슨 짓이냐!"
"8황자!"

3황자의 고통에 찬 비명과 황태자의 놀람에 가득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현은 종현의 손목을 붙잡고 연각 밖으로 나가버렸다. 종현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가기를 약 십 분. 마침내 민현이 한 곳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종현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손목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괜찮으냐."

다정한듯 무심하게 물어 오는 민현에 종현이 더 서러워져 참으려던 울음이 터져버리고 만다.

"흐윽... 끅.... 흑...."

민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당황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종현을 품에 안아서 토닥토닥 달래준다.

"괜찮다. 여긴 우리밖에 없어. 울고 싶은 만큼 울어라. 여기서 나가면 이렇게 울지 못할 게야.."

민현의 따뜻한 품에 안겨 울기를 한참이었다. 민현이 도리어 미안해질 정도로 종현은 정말 펑펑 울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내가 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8황자님이 나서지 않으셨으면 현실이 되었을 끔찍한 미래가 떠올라 그저 속상하고 서러울 뿐이었다. 한참을 더 울고 나서 종현의 눈물이 간신히 멎었다. 민현에게서 떨어지니 이제야 보이는 제 눈물로 흠뻑 젖은 민현의 옷. 하필 오늘 연하늘색 옷을 입어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종현이 당황해서 손을 뻗어 물기를 털려고 하였다.

"아, 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미 눈물이 비단에 다 스며든 건지 아무리 털어도 하나의 변화도 없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이냐?"
"....예.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위를 둘러 보니 8황자를 만났던 정원이다. 제게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저를 데려왔는지... 의문에 찬 눈으로 민현을 올려다 보자 민현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럼, 길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줄 수는 없지 않느냐."
"아... 예. 송구하온데 저는 8황자 전하와 나이가 같사옵니다."
"응, 알고 있다."
"아..... 예에.."

종현이 울어서 새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한다.

"꽃을... 조금 보아도 괜찮을련지요?"
"마음껏 보거라."
"감사합니다."

 민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종현이 꽃을 보다가 향기를 맡으러 고개를 숙이고 팔을 걷으니 이내 새파랗게 멍이 든 손목이 드러난다. 민현의 눈이 다시 한번 차갑게 식더니 종현에게 걸어가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이 왜 이러는 것이냐."

민현이 다른 손목도 걷자 그쪽도 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아니, 그쪽은 더 심했다.

"어찌하여..!"
"..... 아까 3황자..전하께서 잡으셨을 때 멍이 들었는데, 이곳으로 오다가 왼손목의 멍이 짙어졌습니다."
"내가 붙잡아서 멍이 짙어졌다는 이야기구나. 미안하다. 내게 멍에 잘 드는 약이 있으니, 내 처소의 궁녀에게 일러 약을 가져다 주라 하겠다. 미안하구나."
"황자 전하께서.... 어찌 미안해하십니까. 황자 전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종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눈가가 붉어진 것이 꼭 다시 울 것만 같다.

"...알겠으니 울지 말거라. 탈수로 쓰러질까 염려되니."

민현이 종현을 안고 다시 토닥토닥 달래주었다. 울지 말거라, 속삭이며 말이다.

"이제 이 곳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 자, 여기 이곳을 들어오는 열쇠니라. 이건 복사본이고, 원본은 내 처소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다시 눈가가 붉어져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받아든 종현이다.

"아, 그리고.. "

민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금 떨어진 붉은색 꽃에게로 걸어가 조심스레 몇 송이 꺾어 종현에게 주었다.

"군자란이다. 원래 1월~3월에 피는 꽃인데 10월이 다 된 지금에도 피었구나. 너에게 주라고 핀 것이겠지."

이내 문을 열어 종현에게 나가자 손을 내미는 민현이다. 손을 잡아야 할지 말지 고민하다 종현이 손 대신 말을 건넸다.

"...나인들이 오해합니다."
"아... 알겠다."

민현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어 들이고는 앞장 서 정원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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