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길 2017. 9. 12. 22:26

황제의 길 5

궁에서 지낸 지도 어느새 1년이 가까이 되고, 종현이 성인이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종현의 집안의 성인식은 매우 특이했다. 점쟁이의 집안답게 성인이 되는 날에는 신어를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천신이 빙의한 것처럼 종이에 신탁을 적어 나가게 된다. 물론, 신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이제 제법 가까워진 진상궁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그 옆에 보이는 건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태황전의 어린 궁녀. 황제를 모시는 궁녀들은 복색도 남달라, 다른 이들과 구분하기 쉬웠다. 그들의 옷의 소매 끝에는 항상 금색 실로 자수가 세겨져 있었다.

"아... 바로 가겠습니다."

종현이 읽던 책을 덮고 태황전의 궁녀를 따라 나섰다. 흐린 날씨 탓인지, 태황전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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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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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즘엔 잘 지내는가?"
"폐하의 은덕 안에서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종현이 황제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변을 내놓자 황제가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전에 시영이 일은... 들었는가?"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종현이 움찔했다.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일이 결정된 이후, 민현이 손수 제 처소로 와서 말해주었다. 그는 한 장군을 따라 변방을 수비하게 되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종현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를 보면, 아니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래도 그가 떠나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이곳에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이제야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종현이 떨리는 손을 서로 붙잡았다. 황제의 앞이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예, 들었..나이다."
".......참 짐이 면목이 없네. 전에 진작 사과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사과해서 미안하오. 내가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소이다..."

종현의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식.. 교육이라니. 교육을 받지 못한것은 아닌지, 대체 무얼하며 컸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종현의 귀에 들린 것은 자신의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황송하나이다."

황제가 종현을 안타깝게 쳐다보다가 이내 차와 다과를 내오게 하였다. 달콤한 다과가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짐이 부른 것은... 그대의 성인식 때문이오."
"성인식... 말씀이십니까."

종현의 머릿속에서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내 성인식? 왜?

"그래, 그대 가문에서는 대대로 성인식 날 신탁을 받는다고 하더군."
"아...예. 맞사옵니다만..."
"그대의 성인식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싶어 이리 불렀네."
"소인의 성인식을... 말씀이십니까?"
"맞네. 신탁의 내용이 미래와 관련된 것이라지? 꼭 한번 보고싶네만."
"아..."

3황자의 얘기를 꺼내더니, 이내 종현의 성인식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황제. 내 성인식이 왜 보고 싶을까... 종현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신탁 받는게 신기해서 그런가?

"예,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정확히 날짜가 언제인가?"
"다음 달의 아흐레 날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그날 다 준비해놓겠네."
"황송하옵니다."


종현이 별 생각 없이 수락했고, 이에 황제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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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새 종현의 성인식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종현은 말 그대로 죽을맛이었다.
황제가 종현에게 성인식 참관을 하고 싶다 물어 성급히 수락한 것이 문제였다. 차기 황제가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성인식을 궁에서 한다고 아버지께 연통을 보냈더니, 아버지께서 우려의 말을 담은 편지를 보내오셨다. 혹시나 나라의 부정적인 일이 신탁으로 내려오지는 않을까 이 아비는 염려된단다. 종현은 편지를 읽은 직후에 민현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차기 황제의 신탁이 내려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황궁에 커다란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불 보듯 뻔했고, 최악의 경우 종현의 식솔들은 반란죄로 전부 몰살될 수도 있었다. 신탁을 받기만 한 게 무슨 죄냐고? 신탁을 받은 죄, 나라를 어지럽힌 죄. 그리고...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제 성인식 준비가 한창인데 이제 와 황제에게 무르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종현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기 황제의 신탁이 내려오지 않기를 비는 것 뿐이었다.

"게 누구 있느냐?"

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종현님, 8황자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이제는 꽤 친해진 민현이 들어섰다. 종현이 민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리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민현이 달려와 부축했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가 두고..... 식은땀이 나지 않느냐."

민현이 종현을 장난스레 타박하다가 얼굴에 흥건한 식은땀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민현의 큰 손이 종현의 이마 위로 올라왔다.

"어디 아픈 게냐? 의원을 불러야겠느냐?"

종현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민현이 종현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본인은 그 옆에 앉았다. 종현이 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후우, 한숨을 한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머리가.. 많이 복잡해서 그럽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했길래... 방이 더운 게냐? 여름이 오고 있어서? 침방에 더 시원한 옷을 지으라 말을 해 놓을까?"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러면.. 시원한 차라도 한잔 들자꾸나."

차가운 오미자차와 다과가 나왔다.
시원한 것이 들어가니 한결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종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민현이 이를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며칠 뒤가 성인식이라 들었다."

예, 성인식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종현이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현이 찻잔을 매만지다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것 없는지, 안부도 물을 겸 겸사겸사 온 것인데.. 아무래도 내가 시간을 잘못 맞췄나 보구나."
"..."
"그만 가 보겠으니, 좀 누워서 쉬어라. 성인식 날에도 아프면 안될것이 아니냐."

민현이 말을 마치고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현이 조용히 민현을 불렀다.

"황자님."
"응?"

민현이 뒤돌아보았다. 종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쉬고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고 싶으십니까."

이를 들은 민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민현이 조용히 종현에게로 다가와 왼손을 탁자에 짚고 오른손으로 종현의 턱을 그러쥐며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종현은 이때 처음 느꼈다.
이 남자, 위험해.
두 눈은 붉은빛으로 물들은 듯 했고, 입꼬리는 가볍게 비웃듯 미묘하게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발톱을 숨긴 맹수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황자이시니까요. 황위 계승권이 있으시니까요. 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어버이가 되실 수 있는지, 감히 궁금합니다."
"한 사람만 나를 믿어 준다면."
"..."
"이번에는 내가 묻지.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무슨..."
"대답하거라."

민현이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종현은 그 기세에 눌려, 입을 열수조차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끄집어냈다.

"저는..."
"그래."
"황자님을...."
"나를?"
"...."

무어라고 답을 해야할까. 당신이 황위에 오를 몸이라고?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내가 아픈 애를 상대로 뭐하는 짓인지, 참..."

평소의 민현으로 돌아왔다.
턱에서 손이 떨어지자, 종현이 저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났다. 평소에는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싫어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무서웠느냐? 눈물이.."

당황한 민현이 종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종현에게 채 닿기도 전에 종현이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살짝 제 눈에 손을 대보니 물이 묻어나왔다. 민현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는 물러났다.

"...쉬거라."

한마디를 남기고 민현이 방을 나섰다.
민현이 나가자마자 종현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빠오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종현이 느꼈던 그 느낌은 이미 황자의 것이 아니었다. 종현이 보았던 미래가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곧 황궁을 집어삼킬 피바다를 떠올린 종현이 힘없이 쓰게 웃어보였다.
한편, 민현은 종현의 처소를 나서며 본인이 말실수를 했으니 잘 달래달라고 진상궁에게 작게 언질을 주었다. 이후 바로 그의 정원으로 갔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문을 잠그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그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문득 종현에게 준 군자란이 생각났다. 여전히 붉고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군자란을 보며 종현을 떠올리던 그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숨섞인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너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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