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낙서 2017. 9. 8. 18:20

TEA PARTY (上 : in midnight)

바다를 닮은 푸른색과, 고급스러운 은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화려한듯 심플한, 무척이나 아름다운 카페.이곳은 종현이 운영하는 카페인 "캔버스"이다. 캔버스가 다른 카페들과 다르게 차별화 된 점이 있다면, 서울 변두리의 작은 허브카페라는 점이다. 인적이 많은 지역은 아니라, 종현의 카페 캔버스는 인터넷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주유소가 있는 것도 한몫 했다. 체인점의 일반적인 매장 사이즈 정도 되는 크기의 카페이지만, 종현은 혼자 힘으로 카페를 알차게 잘 꾸려 가고 있었다. 카페의 메뉴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또 다르게 보면 있을 것 다 있었다. 간단히 차와 간식류, 식사류로 나눌 수 있는데, 차는 홍차, 캐모마일 밀크티, 여러가지 종류의 과일 가향 우롱차, 그리고 계절차가 있었다. 간식류는 허브쿠키, 허브 빵 등 여러가지 종류의 허브 쿠키와 빵이 모인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사류에는 오므라이스와 로즈마리 스파게티가 있었다. 종현의 카페에 직원이 한둘이라도 더 있었다면 메뉴가 더 늘어났을 텐데, 혼자 운영하고 가끔 부모님께서 거들어 주시는 탓에 더 욕심내어 메뉴를 늘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은 주문을 받아 종현만의 특별한 케이크를 만들곤 했는데, 이를 맛본 사람들은 모두 다음 해에도 종현에게 케이크를 부탁하곤 했다. 이렇듯 건너건너 찾아 종현에게 케이크를 부탁하는 이는 벌써 스무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종현의 카페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어, 종현의 아버지께서 농사를 짓고 여러가지 농산물들과 농기구들을 넣어 놓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종현이 대학을 졸업하고 어릴적부터 관심이 있던 허브에 관한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렇지 않아도 땅과 창고를 처분하려 했던 부모님께서는 땅의 대부분을 처분하시고, 창고와 땅의 절반을 종현에게 물려주셨다. 이후 인테리어 공사 끝에 창고는 허브카페 "캔버스"로 탄생하게 되었고, 나머지 땅은 종현이 직접 기르는 허브농장이 되었다.

어느날 오후 9시경. 다른 날들과 같이, 오늘도 종현은 카페의 문을 닫으려고 정리하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다. 이제 장마 끝무렵이라는데, 비 많이도 온다. 잠시 밖을 바라보던 종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리가 다 끝난 후, 카페에 블라인드를 치고 2층으로 올라가면 있는 제 집으로 가려 하였다. 블라인드를 치려고 유리창으로 다가가고 있는 도중, 검은색 차 한대가 카페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더니 시동이 꺼졌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내렸다. 뭐지, 종현이 중얼거리는 사이 남자가 카페 문 앞에 와서 섰다. 비를 쫄딱 맞은 채, 남자가 문을 살짝 열고 종현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진짜 죄송한데요... "
"네?"
"비 그칠때까지만 잠깐 있어도 될까요? 돈은 낼 수 있습니다."
"...네?"
"아, 사실 제 차가 오는길에 방전이 되어버려서... 죄송합니다. 사례는 충분히 할게요."

비를 맞아도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그리고 잠시만 있게 해달라는 부탁. 게다가 캔버스는 서울 톨게이트와 멀지 않아 이 근방에는 모텔이나 호텔이 전혀 없었다. 종현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들어와서는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비 맞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현이 입을 열었다.

"추워... 보이시는데, 마실거라도 드릴까요?"
"아,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허브티 좋아하는거 있으세요?"
"...글쎄요. 허브티는 많이 안 먹어봐서.. "
"가장 무난한걸로 드릴게요. 로즈마리 밀크티 괜찮으세요?"
"당연하죠."

종현이 블라인드를 치고, 문을 잠군 뒤 서둘러 로즈마리 밀크티를 만들었다. 물을 조금 끓여, 로즈마리 잎을 망에 넣어 적당히 우려냈다. 그리고 우유를 뎁혀 차에 넣었다. 꿀을 조금 넣고, 로즈마리 꽃잎을 띄워 장식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차를 들어 한 모금 조심히 마셨다.
꿀꺽 -
고요한 탓에 차가 식도로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동시에 종현도 마른침을 삼켰다. 맛이 어떨까, 괜히 긴장이 되었다.

"와, 정말 맛있는데요?"
"아, 정말요? 입에 맞으셔서 다행이네요!"

남자가 차를 마시고 몇 분 뒤에야 종현은 남자가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담요라도 갖다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든 생각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사람이라는 것.

"잠시만 계세요."

종현이 잽싸게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창고에서 담요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남자에게 건넸다.

"아! 그렇잖아도 조금 추웠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

종현이 친구처럼 친근하게 웃으며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가만, 우리 통성명도 안했잖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앗, 죄송합니다."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종현에게 건네주고는 멋쩍게 웃었다.

"다행히.. 안 젖었네요."
"N그룹 마케팅 A팀 부장 황민현...씨?"
"네, 맞아요."

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훨씬 넘어가서야 떨어진 급한 출장의 승인 탓에 그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남자를 보며 이름도 참 멋지다고, 종현은 생각했다.

"저는..."
"김종현씨?"
"네? 어떻게..."
"그쪽 명찰에."
"아아..."

종현은 항상 카페에서 명찰을 달고 다녔다. 명찰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저기요" 부터 시작해서 "아저씨" 까지 호칭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중 특히 듣기 싫은 호칭은 "저기요" 였다. 그냥 저기요! 하고 부르면 모를까, 저~기요~! 하면서 기분나쁘게 부르는 손님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명찰을 단 이후부터 종현씨 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꽤 되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아, 저요? 저는 스물일곱이요. 종현씨는?"
"동갑이네요. 스물일곱이에요."
"오, 되게 동안이시네요."
"네?"
"스물 셋이나 넷쯤 되실 줄 알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핫."

하핫이라니. 말투도 외모도 참 귀엽다고 민현은 생각했다.

"엣취!"

민현이 재채기를 했다. 감기에 들려는 모양이다.

"...음, 민현씨?"
"네?"
"그.. 상태로 계시다가는 몸살감기 걸리시기 딱인것 같은데,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실래요?"
"....네?"
"저 위층에 살거든요. 비... 그치려면 한참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차 방전되서 보험회사 불러야 하잖아요. 새벽에 올 리도 없고. 그리고 손님을 카페에 혼자 두고 가는건 예의가 아닌것 같아서.."
"아.."
"씻고, 갈아입으실 옷 드릴테니 갈아입으시고 주무시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민현이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종현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종현이 말했다.

"실내에서 화분에 키우는 허브도 있고, 창고도 생각보다 커서.. 카페보다는 집이 훨씬 클거에요."
"그렇군요."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원하고 달콤한 허브향이 풍겨왔다. 민현이 무심코 종현에게 물었다.

"무슨 향이에요?"
"아, 유칼립투스 향에다가 스테비아 살짝 섞은 향이에요. 제가 비염이 조금 있어서.."
"어떻게 한 거에요? 식물 그대로?"
"아뇨, 오일 살짝 뿌리고 거실에 디퓨져 있어요."
"판매하는 제품입니까?"
"아뇨, 제가 쓰려고 만든건데요. 그런데 왜..."
"아, 아닙니다."

시원하면서도 이보다 더 달콤할 순 없는 향기, 그의 첫사랑에게서 맡아본 것과 비슷한 향기. 민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쳐 지나간 탓에 첫사랑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유칼립투스가 정말 상쾌한 향을 가진 허브라는건 아는데, 스테비아는 무슨 허브에요?"
"설탕보다 칼로리는 현저히 낮지만 당도는  200배에서 300배나 되는 허브의 한 종류에요. 키우기가 조금 까다롭기는 한데, 저는.. 옥상에서 조금씩 기르고 있어요."
"한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허브입니까?"
"음.. 글쎄요? 다이어트 용으로 드시는 분들은 꽤 되실텐데...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진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종현이 민현을 뭐지? 하는 눈길로 쳐다보다가 이윽고 화장실로 민현을 안내했다.

"씻고 나오세요. 옷은... 제가 민현씨보다 키가 조금 작아서 맞는 옷이 있을지 찾아 볼게요."
"감사합니다."

민현이 화장실 문을 잠그고 샤워기 물을 틀었다. 쏴아아 - 물이 차갑게 나오다가 점차 따뜻해졌다. 민현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옷을 벗었다. 적당히 탄탄하게 근육잡힌 몸이 드러났다. 민현이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물에 씻었다. 그의 첫사랑은 그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열다섯 중학교 2학년 시절, 그는 한번 버스에 치일 뻔 한 적이 있었다. 횡단보도가 초록불인 줄 알고 두어걸음 내디뎠다가 이내 빨간불인 것을 알아채고 멈춰섰는데, 버스가 빠앙 -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버스가 멈출수도 없는 거리였다. 놀라 잔뜩 굳어있는 민현의 팔이 누군가에게 잡힌 것은 찰나였다. 한 아이가 잽싸게 민현의 팔을 끌어당겼다. 인도 턱에 걸려 넘어져 손바닥을 살짝 쓸렸지만, 다행히 큰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그 아이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상쾌하고 달콤한 향기와, 예뻤다는 것. 이름을 물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금방 잊어버렸었다.

민현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다 씻고 나오니 문앞에 옷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반바지 츄리닝에, 딱 맞는 맨투맨. 민현이 입자 곧 종현이 방에서 나왔다.

"맨투맨 사이즈 맞네요? 다행이다 - 저한테 조금 큰 거라서 드렸는데, 사실 안 맞을까봐 조금 걱정했어요."
"딱 맞는걸요, 뭐. 감사해요. 입고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어유우, 아니에요."

종현이 손사래를 쳤다.

"가지셔도 돼요. 저한테 커서 어차피 잘 못입거든요... 바지는 같은거로 하나 더 있고요."
"그래도..."
"차 드실래요? 뭐 드시겠어요?"

민현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종현이 바로 주제를 바꾼다.

"단거 괜찮으세요?"
"음, 네."
"과일 뭐 좋아하세요?"
"자몽?"
"자몽 아이스티 드릴게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종현이 부엌으로 다가가 냉장고에서 미리 잘라놓았던 자몽 조각을 꺼내고, 얼음을 컵에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물을 끓였다. 종현이 차를 타는 모습을 보고 민현이 다가왔다.

"과일은 미리 잘라두시는거에요?"
"네에. 과일 아이스티는 제가 자주 먹는 편이라서.. 아무리 적게 마셔도 일주일에 서너잔은 마시는 것 같아요."
"아.."

물이 끓자, 종현이 통을 가져와 잎을 꺼냈다. 그리고 물을 다른 컵에 따르고, 잎을 넣어 우려내기 시작했다.

"무슨 잎이에요?"
"홍차잎이요. 이러면 맛이 더 진하고 맛있어요."
"아이스티에 홍차... 신기하네요."
"드셔보셨을텐데. 립*의 아이스티에도 홍차 성분 들어가요."
"아, 정말요? 몰랐어요."

홍차가 진하게 우러나자 종현이 자몽 한 조각을 집어 도구로 꾸욱 짰다. 자몽 즙이 홍차로 떨어지자, 숫가락으로 잘 섞고는 스테비아를 조금 넣은 후 얼음이 들어 있는 컵에 홍차를 부었다. 자몽을 한조각 더 들어 한번 담갔다 빼서 위에 얹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민현이 한 모금 마셔보더니 눈이 커졌다. 기존의 아이스티와는 다른, 더 진하고 더 달콤한 맛.

"와..."
"괜찮아요?"

종현이 긴장된 상태로 물어왔다. 사실, 저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과일 아이스티를 대접한 것은 처음이라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맛있어요. 허브는 마냥 쓰고, 깊이있고, 뜨거운 음료라고만 생각했는데 방금 생각이 바꼈어요."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사실 과일 아이스티 대접한건 민현씨가 처음이거든요.. 장마철 지나가면 메뉴로 넣어서 판매해도 되겠다."

웃으며 신나하는 종현을 보고 민현이 경악했다.

"이 메뉴를 지금까지 썩히고 있었던 거에요?! 과일 여러종류로 해서 판매하면 진짜 잘 팔리겠는데요? 아님 과자랑 세트로 판매해도 좋겠네요."
"헐, 과자랑 아이스티 세트. 아이디어 괜찮은데요? 아이스티가 상큼하니까.. 과자는 마냥 달게 가도 좋겠다. 음, 아니면 보통으로 가서... 조금만 달아도 궁합이 잘 맞겠네요. 아이디어 고마워요!"

말을 끝내자마자 종현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홍차를 더 우려내고, 우연찮게도 바로 전날 시범삼아 구워둔 몇 종류의 쿠키를 내왔다. 덩달아 민현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종현이 내 온 차통을 줄지어놓고, 다 우려진 홍차를 차통의 개수만큼 컵에 옮겨 담았다. 가장 먼저 타진 차는 아이스티계의 대표 주자, 복숭아. 역시 복숭아는 성공적이었다. 복숭아와 가장 어울리는 것은 라즈베리 쿠키였다. 그 다음, 레몬, 포도, 오렌지를 홍차와 접목시켜 본 결과 결국 복숭아와 자몽만을 세트로 출시하기로 했다. 쿠키는 라즈베리 쿠키 그대로.

"그럼 내일부터...."

종현이 신이 나서 움직이려다 피곤해 보이는 민현을 보고 멈칫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쉬시겠어요?"
"어... 네.."

민현이 눈을 비비며 대답을 하자, 종현이 곧바로 민현이 오늘 묵을 방을 안내해 주었다. 흰 벽지에 보이는 갈색 계열의 침대, 자그마한 책상, 그리고 옷걸이.

"손님 방이에요. 주무세요. 저는 조금 더 있다가 자야 할 것 같아요."
"잘자요, 종현씨."

졸림이 가득해 무심결에 나온 민현의 중저음에 방문을 닫고 나가려던 종현이 흠칫 뒤돌아보고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종현의 뺨이 약간 붉어진 것 같은 건 민현의 착각이었을까?

"아, 피곤해..."

지방 인사와의 딱딱한 미팅, 장시간의 운전, 그리고 고장난 차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민현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몸을 움직여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살며시 잠에 빠져들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허브향기가 퍼지는 듯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 향기에 민현이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참고 ; 카카오페이지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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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

투둑 - 툭 -

아, 비가 오네.
비가 온다, 종현아.
많이 보고싶다. 거기는 어때? 괜찮아?
나는 네가 정말 많이 보고 싶은데, 너는 어때?
오늘처럼 비가 올때면 네 생각이 나.
비가 많이 오네.
오늘 낮에 너무 더웠는데, 창문을 다 열어놓으니까 시원해. 내 마음같아. 너무 차갑고 시려와.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네 생각에 눈시울이 너무 뜨거워, 종현아. 울고 싶지 않은데,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이건 눈물이겠지.
예전에는 비가 오는 날이 너무 행복했었는데.
알바하는 너를 데리러 나가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어. 너도 알거야. 너를 데리러 나갈 때, 항상 웃고 있던 내 모습을. 검은 우산 아래 행복하던 우리를.
정말 미치도록 보고싶다.
미안해, 종현아.
미안하단 말 밖에 할 수 없어서 더 미안해.


오늘 낮에 또 비가 왔어, 종현아.
비가 오면 네 생각이 더 선명해져서 좋은데, 너무 아프다.
누가 날 죽여줬으면 싶을 정도로 아파. 심장이 아려. 오늘은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에 숨이 안 쉬어져서 주저앉을 뻔 했어.
종현아, 넌 거기서 항상 웃고 있는거지?
나는 이렇게 아파도, 너만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많이 보고 싶어.
너무 이기적인것 같지만, 날 보게 된다면 잘 지낸다고,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줘. 부탁이야.
한마디만 해주면 내가 숨을 쉴 수 있을것 같아. 통증이 덜해질것 같아.
정말 그립다, 종현아.


오늘 짐 정리를 하다가 너와 찍은 사진이 있는 사진첩을 열었어.
요 며칠 비가 오지 않아서, 조금 살 것 같아 큰 맘 먹고 열었는데 열자마자 다시 닫아버렸어.
첫 페이지에 하필 너 대학교 졸업사진이 있더라.
왜 하필, 첫번째 페이지에 그걸 뒀어.
대학 등록금만 아니었어도 네가 지금까지 내 곁에 있었을텐데.
대학 등록금만 아니었어도 대출을 안 받았을거고 결국 힘들게 알바 할 일도 없었겠지.
아니, 우리 집이 조금만 더 넉넉했어도. 아니, 내가 널 만나기 직전에 내가 모아둔 돈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지만 않았어도 네가 내 곁에 있을텐데.
한가지 더 마음이 아팠던 건, 사진이 빛을 바래가기 시작하더라. 네가 그렇게 긴 시간동안 알바를 한 걸 생각하니까 너무...아, 정말 왜 이러지. 나 다시 눈물이 난다.
네가 가기 전에 내 손으로 맛있는 밥 한번 못 해 먹이고, 하다못해 비싼 밥 사주지 못해서 진짜 너무 후회스럽다. 나중에 보니까 너 너무 말랐더라. 미안해.
아, 다시 비가 온다.


오늘 오랫만에 차분한 느낌이 들고 숨통이 좀 틔여서 너와의 인연을 정리해보았어. 우리 긴 시간이었지만 너무 한 게 없더라. 내가 대학교 2학년에 유럽여행을 다녀왔으니 우린 대학교 3학년때 만났고, 그때 넌 대출을 받았지. 우리가 사랑하게 된 게 4학년이었지?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살고, 너는 알바하고 나는 곡을 쓰고. 그리고 27살때 이별. 알바를 끝내던 그 날 하필... 정말 아직도 그 차주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 그 사람은 아직 감옥에 있어. 5년형 선고받았었으니까, 이제 3년 남았네. 그 사람 때문에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던 너를 생각하면 정말 5년은 껌이야. 무기징역이었어도 시원하지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너와 만난 5년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는데. 사실 히트곡도 다 너의 덕분이야. 종현이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예쁜 가사를 쓰고, 예쁜 노래를 만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해. 지금은 그런 노래가 전혀 써지지 않아. 아예 곡이 써지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내가 대학교 3학년 중반까지는 너무 막막했었어. 내가 가사를 유별나게 잘 쓰는것도 아니고, 멜로디를 어마무시하게 잘 뽑는것도 아니고. 정말 다 네 덕분인데. 그 전까지는 무채색이었는데, 물감을 들고 내게 다가와 무지개빛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여하튼.. 너무 보고싶다.


안녕, 종현아.
이게 내가 쓰는 마지막 편지야.
오늘 정리 다 마쳤어.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쓴 곡 주고 오는 길이야. 아마 내 인생의 마지막 곡이겠지. 굳이 예쁜 사랑 노래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노래가 써지더라.
다시 비가 오네. 참, 무슨 심장이 자동반사야. 욱신욱신 아파온다.
조금만 기다려, 곧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그곳으로, 너와 마주보고 손잡고 웃을수 있는 그곳으로.

잠시만 안녕, 곧 다시 만나자.
사랑해 , 종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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