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길 2017. 8. 14. 00:14

황제의 길 4

"종현님! 어디계셨습니까! 괜찮으신겝니까!"

처소로 돌아오니 이미 연각에서의 일이 전해진 듯 놀람으로 상기된 얼굴으로 종현을 맞아주는 진상궁이다. 종현의 눈기젖은 눈을 보자마자 도리어 진상궁이 울 것 같았다. 그녀가 종현의 몸을 이리 저리 살피며 옷이 찢어진 곳은 없는지, 다친곳은 없는지 살폈다. 그녀가 낮은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 말하려 종현의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이 잡히는 순간 종현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가 아차 하고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 순간 진상궁의 눈매가 매서워지더니 종현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새파랗게 멍이 든 손목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이제야 종현이 들고 있는 붉은 꽃으로 눈을 돌렸다. 손목과 꽃을 번갈아 보던 진상궁이 곧 이해한듯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8황자 전하시군요."
"어떻게..."
"궐 안에서 이리도 어여쁜 꽃을 가꾸는 곳은 8황자 전하의 정원밖에 없으니까요."

이제야 진상궁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군자란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고귀>라는 꽃말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봄에 피는 꽃인데, 8황자께서 공들여 날씨에 관계없이 피는 꽃들 중 하나입니다."
"고귀... 라구요."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그래도 나를 고귀하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종현이 꽃을 전해줄 때의 민현을 떠올렸다. 분명 올해 우연히 피었다고 하셨는데.. 생각을 더듬어 보니 말을 할 때 8황자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부끄러우셨나 보네.

"계십니까?"

때마침 8황자전의 궁녀가 도달했다.

"무슨 일이냐?"
"8황자님께서 이 연고를 종현님께 보내라 이르셨습니다."

궁녀가 말을 마치고는 곱게 싸인 연고를 종현에게 건넸다.

"....감사하다 전해드릴 수 있겠느냐."
"예. 그럼 물러가겠나이다."

진짜 보내주셨네, 연고.

"들어가 바르고 계십시오. 따뜻한 차와 다과를 금방 올리겠습니다."

진상궁이 종현을 방에 두고 차와 다과를 가지러 나갔다.

황제의 길
아름다운 8황자, 민현이 걷는 길

"폐하께 내가 왔다고 고하거라."
"황자 전하, 지금 폐하께선 대신들과 논의를..."

민현이 상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8황자, 이게 무슨 추태냐."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기된 얼굴에, 날카로워진 눈빛을 보고 황제가 할 말을 잃었다. 철이 들고, 한번도 감정적으로 행동한 적 없었던 민현이었기에 심상치 않은 일이라 짐작되었다.

"미안하오. 내일 다시 논의 할 수 있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용히 예를 표하고 나가는 이는 이 나라의 재상 중 한명인 영의정 이정이었다. 민현이 그가 나가는 것을 짧게 바라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오늘이 3황자 형님의 생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연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형님께서 오늘 모든 황자들과 형님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내를 겁탈하려 하셨습니다."
"무어라!"

황제가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그가 차를 내오게 하였다. 잠시 후 차가 나오고, 민현이 차분하게 이를 받아들었다.

"그래서, 사내는 누구더냐."
"...점쟁이의 아들입니다."
"뭐라?!"

황제가 잔을 탁, 놓쳐버렸다.
와장창 -
잔이 산산조각 나 깨져버렸다.
그 와중에도 민현은 차분함을 유지 한 채 차를 마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소자가 형님이 겁탈하려 하였다 라고 고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는 무사하옵니다."
"하아, 아소 그놈이 기어코... 정말 막 나가는구나. 분명 네가 제지했을 테니 네가 이리 달려왔겠지. 그 아이는 어떠하냐? 괜찮은 게야?"
"많이 놀란 듯 싶었으나, 달래어 처소로 보냈습니다."
"허어, 참.... 이럴때 보면 황제의 재목은 너이거늘."

찻잔을 내려놓던 민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지금, 무슨.."

황제도 당황한 듯 싶었다.

"들었느냐?"
"... 아니오, 못 들었습니다."
"내 잠시 허언을 했구나. 못 들었다니 다행이로다."

입으로는 허언을 했다 하지만, 민현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날카로웠다.  민현이 아주 어렸을때, 폐하가 아닌 아버지로 부르던 시절 들은 말이 순간 생각났다.

"민현아, 궐에서는 때로는 제대로 들은 것도 못 들은 체 하고, 제대로 본 것도 못 본 체 해야 할 때가 있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네가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아비의 말을 잊지 말거라."

민현이 찻잔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제가 형님의 손목을 꺾었습니다. 아마 금이 가거나 골절되었을 테지요. 미리 고할 겸 해서 왔습니다."
"...알겠다. 네가 다친곳은 없을 터이니 딱히 묻지 않겠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네게 문책하지 않을테니, 맘쓰지 말거라."
"황송하나이다."

순간, 손에 붕대를 감고 3황자가 들이닥쳤다.

"아버님! 민현 이 자식이 감히 제 손목을.. 어라? 너 이 새끼는 왜 여기 와 있는거냐?"

아직도 술기운이 다분했다. 감히 술을 마시고 폐하 앞에 서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3황자 아소가 비틀비틀 민현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민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소 네 이놈!"

황제의 노여움도 상관 없는 듯 보였다. 3황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너 이 새끼, 니새끼 때문에 부러진 내 손목을 봐! 시발새끼야! 그깟 점쟁이의 아들놈이 뭐라고 내 손목이 이렇게 분질러져야 하는거냐! 그 새끼가 얄상하니 계집마냥 곱게 생긴 것이 잘못이지, 홀린 내가 잘못이냐고! 새끼야, 내 밑에서 한번쯤 우는게 어때서!"

말을 마치려던 3황자가 무언가 알아차린듯 깔깔 웃으며 민현을 바라본다.

"크하하, 설마 독점욕인거냐? 네놈에게는 이미 밑을 대 주었느냐? 그래서 그런거로구나? 하하하! 이제 이해가 되는구나!"
"....반대쪽 손이라도 부지하시려면 그만하시지요."
"호오, 이젠 나를 겁박하는 게냐? 응? 네놈과 그 새끼가 한밤중에 정원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이래도 발뺌할 게냐?!"

3황자가 민현의 어깨를 잡고 미친듯이 웃으며 앞뒤로 흔들어댔다.

우두둑 -

"아악! 내 손가락!"

민현이 다시 손을 들어 손가락에 힘을 주어 3황자 아소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귀에 속삭였다.

"그 입 닥쳐. 그 날은 그 아이가 궁에 처음 온 날이야.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하다가 내가 실수로 열어둔 정원에 들어간거고. 알려면 제대로 알라고, 미친새끼야."

말을 마친 민현의 눈이 소름돋게 차가웠다. 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3황자가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3황자!"
"아,아버님."

이제야 3황자의 눈에 황제가 들어왔다. 분노에 차, 얼음과도 같은 민현과 달리, 머리 끝까지 화가 나 마치 불과도 같은 황제를.

"당장 나가거라!"
"송,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저놈이..."
"내 말이 말 같지 않으냐?! 당장 궐 밖으로 나가란 말이다!"
"궐 밖이라니요..?"
"넌 오늘부로 내 아들이 아니다! 네가 어울리는 그 쓰레기같은 양아치 무리들에게 가던, 네 돈으로 집을 사건 내 알바 아니다! 어서 나가거라!"
"폐하, 진정하십시오. 처사가 지나치십니다.."
"어찌 민현이 네가 짐에게 진정하라 하는게냐! 너는 저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게야?!"
"아버님, 세간의 눈을 생각하십시오. 황자를 폐위시키다니, 호족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자칫 황권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차분히 이후의 일을 예상해 말해오는 민현에 황제가 간신히 진정했다.

"아소 네놈은 처소로 돌아가 꼼짝하지 말거라. 네놈의 그 친구들도 당분간 만나지 말아라!"
"하지만..!"

항의하려던 3황자가 민현의 눈을 보고는 말을 아꼈다.

"알아들었으면 나가거라! 술먹고 황상 앞에 선 죄, 감히 황상 앞에서 언행을 거칠게 한 죄, 그리고 감히 황상 앞에서 멱살을 잡은 죗값은 후에 통보하겠다. 나가거라!"
"...예."

더 있다간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3황자가 재빨리 나갔다.

"후우, 그 아이에게는 황실 의원을 보내주거라. 그리고 네가 자주 가 주려무나. 짐이 대신 미안하다고도 전해주고."
"...예, 폐하."

조용히 예를 표하고 나간 민현을 바라보던 황제가 묘한 눈으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지금 보면 황제감은 틀림없는 민현이다. 자신의 사후, 분명히 벌어질 황위다툼에 벌써 입이 썼다.

'황제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제의 길 5  (0) 2017.09.12
황제의 길 3  (0) 2017.08.06
황제의 길 2화  (0) 2017.07.25
황제의 길 1화  (0) 2017.07.23